서로에게 스며들 수 없다는 허무 혹은 희망
이문정 (미술평론가, 연구소 리포에틱 대표)
‘현실적으로’ 해결해야 할 중대한 문제 : 사람은 행복하면서도 고독할 수 있는 것인가?1)
자신의 열정들을 가지고 산다는 것은 자신의 고통들―그 열정들의 평형추, 중화물, 균형이며 대가인―을 가지고 산다는 것이기도 하다.2)
최우영이 그려내는 노골적이고 직접적인 고독. 혼자여서 고독하다. 하지만 둘이 되고 셋이 되니 더 고독해졌다. 혼자일 수도 없지만 함께일 수도 없다. 홀로되기의 거부. 홀로되기에 대한 선망. 맺어지는 만큼 지워지는 관계. 방 안의 방. 내부 공간의 내부. 내면의 내면이 문을 닫는다. 문은 열리고 다시 닫히길 반복한다. 바스러진 검정 가루로 채워진 사람들의 안과 밖 그리고 허공. 어둠 속의 빛, 어둠 속의 어둠. 어둠은 빛을 빛나게 하고, 어둠은 빛을 어둡게 한다. “밤은 비로소 끝이 났지만, 그림자는 남는다.” 빛은 어둠을 걷어내고, 그림자는 빛을 뒤따른다. 그림자는 빛을 마주한 어둠이다. 낮인지 밤인지. 시간은 흐르는 만큼 멈춘다. 현실인지 꿈인지 아니면 기억인지, 상상인지. 형상을 구분 짓는 검은 선들. 경계를 그린다. 하지만 언제든 지워질 것처럼 연약하다. 거울에 비친 누군가의 모습은 유령 같다. 신기루 같다. 표정이 지워졌지만, 표정이 사라진 것은 아니다.
현대 산업 사회, 물질문명의 발달, 인간의 도구화, 비인간화, 인간 존엄성의 상실은 과거부터 지금까지 고독의 원인으로 여겨져 왔다. 교감이나 친근감이 만들어지지 않는 사회 속 사람들은 낯섦을 벗어나지 못하고, 함께일 때 불편과 불안을 느끼게 된다. 그 결과는 고독을 부정하기나 어쩔 수 없이 혹은 적극적으로 혼자 되기이다. 그 원인이 무엇이든 간에 소외는 대부분 부정적인 의미를 부여받으며, 사회 속 인간 대부분은 고독에서 벗어나거나 그로부터 자유롭기 위해 애쓴다. 그러나 인간은 자신이 이 세상에 태어나기 전부터 존재했던, 그리고 자신이 떠난 뒤에도 어떤 식으로든 존재할 세상에 던져진 이방인이다. 나에게 나 자신은 주체로 다가오지만 다른 이에게 나는 타인이다. 때로는 나에게조차 타인인 나이다. 오롯이 나와 함께 할 수 없는 나이기도 하다. 이렇듯 인간은 함께일 수밖에 없지만, 함께해야 하지만, 그만큼 혼자인 운명을 타고났다. 서로를 의지하지 말라거나 배척하라는 뜻은 아니다. 하지만 나의 생은 오롯이 내가 감당해야 할 몫이다.
죽음도 마찬가지다. 최우영이 적막의 레퀴엠(requiem)이 울려 퍼지는 삼면화를 그려낸 이유가 있다. 이 세상에서 누군가가 끝없이 태어나고 죽는다. 자신이 죽을 것임을 알고 있지만 그 밖의 조건들은 알 수 없는 필멸의 운명은 절대적 두려움과 허무를 불러온다. 그럼에도 인간은 그것을 받아들이거나, 여러 방법을 통해 극복하거나―극복했다고 믿거나―, 망각함으로써 견뎌낸다. 늘 함께 하지만 지워지는 게 죽음이다. 그러나 죽음은 끝없이 상기된다. 세계의 부재, 의미의 부재를 겪게 될 내가 사라질 때까지 피할 수 없는 두려움인 죽음을 향해 가는 주체는 실존을 드러낸다.3) “죽음에 대한 공포감을 극복하지 못하는 한 인간에게 자유란 없다.” “극복하기 위해서는 포기하면 안 된다.” “외면하지 않고 똑바로” 바라봐야 한다.4) 전시장을 채운 그림들. 사각의 문, 사각의 방, 그리고 사각의 관, 그 모두를 담아내는 사각의 화폭이 의미심장하게 다가온다. 인간은 살아갈수록 주변 사람들과 죽음으로 이별하고 애도와 탄식의 과정을 반복하며 남겨진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자기의 죽음을 대면한다. 그렇기에 역시 인간은 고독을 받아들여야 한다. 초연해져야 한다.
낭만적 스테레오 타입을 따르는 것일 수 있으나, 예술가는 더욱 고독에 익숙하다. 온전히 나를 들여다보고 세상을 응시할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보고, 느끼고, 생각한 것을 쏟아내기 위한 시간도 중요하다. 특히 최우영처럼 그리기에 집중하는 경우는 작업실에서 보내는 몰입의 시간이 필수적이다. 화폭이 채워지며 완성을 향하는 과정에서 작가는 어느 정도 예상하고, 어느 정도는 예상하지 못했던 방식으로 고양된다. 그리고 이 과정을 온전히 경험한 작가에게 창작은 삶의 중요한 목적이자 의미가 된다. 자신에게 몰입하는 순간의 고요한 흥분과 그 결과물이 주는 성취감을 무엇도 대신할 수 없다. 그런데 몰입하기 위해서는 한동안 혼자되기의 시간을 보내야 한다.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작가는 자신이 흥미를 느끼고 매혹되는 주제 혹은 형상 등에 빠져든다. 홀린 듯이 몰두한다. 자신에게 주어진 내용적이고 형식적인 문제에 고심한다. 그리고 이때 주변을 향한 관심과 인식은 소거된다. 심지어 작가는 자기 작품과도 거리를 유지해야 한다. 작품과 분리되어 혼자가 되어야 한다. 그래야 자기 작품을 제대로 판단하고 완성을 향해 가는 길을 잃어버리지 않을 수 있다. 열정에 휩싸여 작품에 함몰되면 안 된다. 실제로 최우영의 작품들을 보면, 그려진 사람들 사이의 거리감뿐 아니라 화면 속 인물과 그 화면을 보고 있는 작가 혹은 관찰자 사이의 거리감이 전달된다. 응시의 주체와 대상 사이의 물리적, 심적 거리는 전술한 몰입과 고립, 거리두기 모두를 효과적으로 함축한다.
한편 최우영의 회화를 채우는 흑백의 색채-색채 없음 역시 비현실성과 고독-침묵을 불러온다. 흑백은 단순히 상실된 감정이나 무기력한 삶을 은유하기 위해 선택되지 않았다. 둘 다 알 수 없는, 색이 아닌 색이다. “색 중에서 가장 완벽한 색”이자 “물질적인 성질이나 실체로서 모든 색이 사라진 세계”를 상징하는 흰색과 “가능성이 없는” “해가 진 후의 죽은 무”인 검정만 남은 세상은 정제된 정서를 불러온다. 전시장은 너무 높아 어떤 음향도 들리지 않는 “커다란 침묵”이자 “가능성으로 차 있는 침묵”과 “미래와 희망이 없는 영원한 침묵”으로 가득해진다. 흰색은 “태어나기의 무”이고, 검정은 모든 것의 끝-마지막에 있다. 깊이를 알 수 없는 밝음과 어두움이 함께한다. 무한에 들어서는 차가운 장벽이자 내적으로 울리는 무음이어서 더 감각을 예민하게 한다. 또한 흑백만의 결합은 “시작하기 전의 무”, 종결-완성과 그 이후에 따라오는 다른 세계의 암시로 생성과 소멸을 담아낸다. 모든 것이 시작되기 전의 고요함이자 모든 것이 끝난 뒤의 적막이다. 결국 시작과 끝은 이어진다.5)
모순적이지만, 고독을 느끼는 것은 그만큼 타인을 인식하고 있음을 증명한다. 고독감은 다른 이를 인식할 때 따라온다. 스스로 고독을 선택하는 것 역시 다른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기 때문이다. “결국 자신이 계속 관계 속에서 살아가야 한다는 사실”6)을 깨달았기 때문에 고독이 스며드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최우영의 작업에는 삶과 예술 모두에서 타인에게 열어 보이고 싶은 마음. 나의 영역을 침범받지 않으려 지우지 않는 경계-심이 함께한다. 이제 무엇을 해야 하는지. 가능성은 열려 있다. 우선은 작가가 견딜 수 있고 견디길 선택한 고독에 잠겨 본다.
자신의 열정들을 가지고 산다는 것은 자신의 고통들―그 열정들의 평형추, 중화물, 균형이며 대가인―을 가지고 산다는 것이기도 하다.2)
최우영이 그려내는 노골적이고 직접적인 고독. 혼자여서 고독하다. 하지만 둘이 되고 셋이 되니 더 고독해졌다. 혼자일 수도 없지만 함께일 수도 없다. 홀로되기의 거부. 홀로되기에 대한 선망. 맺어지는 만큼 지워지는 관계. 방 안의 방. 내부 공간의 내부. 내면의 내면이 문을 닫는다. 문은 열리고 다시 닫히길 반복한다. 바스러진 검정 가루로 채워진 사람들의 안과 밖 그리고 허공. 어둠 속의 빛, 어둠 속의 어둠. 어둠은 빛을 빛나게 하고, 어둠은 빛을 어둡게 한다. “밤은 비로소 끝이 났지만, 그림자는 남는다.” 빛은 어둠을 걷어내고, 그림자는 빛을 뒤따른다. 그림자는 빛을 마주한 어둠이다. 낮인지 밤인지. 시간은 흐르는 만큼 멈춘다. 현실인지 꿈인지 아니면 기억인지, 상상인지. 형상을 구분 짓는 검은 선들. 경계를 그린다. 하지만 언제든 지워질 것처럼 연약하다. 거울에 비친 누군가의 모습은 유령 같다. 신기루 같다. 표정이 지워졌지만, 표정이 사라진 것은 아니다.
현대 산업 사회, 물질문명의 발달, 인간의 도구화, 비인간화, 인간 존엄성의 상실은 과거부터 지금까지 고독의 원인으로 여겨져 왔다. 교감이나 친근감이 만들어지지 않는 사회 속 사람들은 낯섦을 벗어나지 못하고, 함께일 때 불편과 불안을 느끼게 된다. 그 결과는 고독을 부정하기나 어쩔 수 없이 혹은 적극적으로 혼자 되기이다. 그 원인이 무엇이든 간에 소외는 대부분 부정적인 의미를 부여받으며, 사회 속 인간 대부분은 고독에서 벗어나거나 그로부터 자유롭기 위해 애쓴다. 그러나 인간은 자신이 이 세상에 태어나기 전부터 존재했던, 그리고 자신이 떠난 뒤에도 어떤 식으로든 존재할 세상에 던져진 이방인이다. 나에게 나 자신은 주체로 다가오지만 다른 이에게 나는 타인이다. 때로는 나에게조차 타인인 나이다. 오롯이 나와 함께 할 수 없는 나이기도 하다. 이렇듯 인간은 함께일 수밖에 없지만, 함께해야 하지만, 그만큼 혼자인 운명을 타고났다. 서로를 의지하지 말라거나 배척하라는 뜻은 아니다. 하지만 나의 생은 오롯이 내가 감당해야 할 몫이다.
죽음도 마찬가지다. 최우영이 적막의 레퀴엠(requiem)이 울려 퍼지는 삼면화를 그려낸 이유가 있다. 이 세상에서 누군가가 끝없이 태어나고 죽는다. 자신이 죽을 것임을 알고 있지만 그 밖의 조건들은 알 수 없는 필멸의 운명은 절대적 두려움과 허무를 불러온다. 그럼에도 인간은 그것을 받아들이거나, 여러 방법을 통해 극복하거나―극복했다고 믿거나―, 망각함으로써 견뎌낸다. 늘 함께 하지만 지워지는 게 죽음이다. 그러나 죽음은 끝없이 상기된다. 세계의 부재, 의미의 부재를 겪게 될 내가 사라질 때까지 피할 수 없는 두려움인 죽음을 향해 가는 주체는 실존을 드러낸다.3) “죽음에 대한 공포감을 극복하지 못하는 한 인간에게 자유란 없다.” “극복하기 위해서는 포기하면 안 된다.” “외면하지 않고 똑바로” 바라봐야 한다.4) 전시장을 채운 그림들. 사각의 문, 사각의 방, 그리고 사각의 관, 그 모두를 담아내는 사각의 화폭이 의미심장하게 다가온다. 인간은 살아갈수록 주변 사람들과 죽음으로 이별하고 애도와 탄식의 과정을 반복하며 남겨진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자기의 죽음을 대면한다. 그렇기에 역시 인간은 고독을 받아들여야 한다. 초연해져야 한다.
낭만적 스테레오 타입을 따르는 것일 수 있으나, 예술가는 더욱 고독에 익숙하다. 온전히 나를 들여다보고 세상을 응시할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보고, 느끼고, 생각한 것을 쏟아내기 위한 시간도 중요하다. 특히 최우영처럼 그리기에 집중하는 경우는 작업실에서 보내는 몰입의 시간이 필수적이다. 화폭이 채워지며 완성을 향하는 과정에서 작가는 어느 정도 예상하고, 어느 정도는 예상하지 못했던 방식으로 고양된다. 그리고 이 과정을 온전히 경험한 작가에게 창작은 삶의 중요한 목적이자 의미가 된다. 자신에게 몰입하는 순간의 고요한 흥분과 그 결과물이 주는 성취감을 무엇도 대신할 수 없다. 그런데 몰입하기 위해서는 한동안 혼자되기의 시간을 보내야 한다.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작가는 자신이 흥미를 느끼고 매혹되는 주제 혹은 형상 등에 빠져든다. 홀린 듯이 몰두한다. 자신에게 주어진 내용적이고 형식적인 문제에 고심한다. 그리고 이때 주변을 향한 관심과 인식은 소거된다. 심지어 작가는 자기 작품과도 거리를 유지해야 한다. 작품과 분리되어 혼자가 되어야 한다. 그래야 자기 작품을 제대로 판단하고 완성을 향해 가는 길을 잃어버리지 않을 수 있다. 열정에 휩싸여 작품에 함몰되면 안 된다. 실제로 최우영의 작품들을 보면, 그려진 사람들 사이의 거리감뿐 아니라 화면 속 인물과 그 화면을 보고 있는 작가 혹은 관찰자 사이의 거리감이 전달된다. 응시의 주체와 대상 사이의 물리적, 심적 거리는 전술한 몰입과 고립, 거리두기 모두를 효과적으로 함축한다.
한편 최우영의 회화를 채우는 흑백의 색채-색채 없음 역시 비현실성과 고독-침묵을 불러온다. 흑백은 단순히 상실된 감정이나 무기력한 삶을 은유하기 위해 선택되지 않았다. 둘 다 알 수 없는, 색이 아닌 색이다. “색 중에서 가장 완벽한 색”이자 “물질적인 성질이나 실체로서 모든 색이 사라진 세계”를 상징하는 흰색과 “가능성이 없는” “해가 진 후의 죽은 무”인 검정만 남은 세상은 정제된 정서를 불러온다. 전시장은 너무 높아 어떤 음향도 들리지 않는 “커다란 침묵”이자 “가능성으로 차 있는 침묵”과 “미래와 희망이 없는 영원한 침묵”으로 가득해진다. 흰색은 “태어나기의 무”이고, 검정은 모든 것의 끝-마지막에 있다. 깊이를 알 수 없는 밝음과 어두움이 함께한다. 무한에 들어서는 차가운 장벽이자 내적으로 울리는 무음이어서 더 감각을 예민하게 한다. 또한 흑백만의 결합은 “시작하기 전의 무”, 종결-완성과 그 이후에 따라오는 다른 세계의 암시로 생성과 소멸을 담아낸다. 모든 것이 시작되기 전의 고요함이자 모든 것이 끝난 뒤의 적막이다. 결국 시작과 끝은 이어진다.5)
모순적이지만, 고독을 느끼는 것은 그만큼 타인을 인식하고 있음을 증명한다. 고독감은 다른 이를 인식할 때 따라온다. 스스로 고독을 선택하는 것 역시 다른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기 때문이다. “결국 자신이 계속 관계 속에서 살아가야 한다는 사실”6)을 깨달았기 때문에 고독이 스며드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최우영의 작업에는 삶과 예술 모두에서 타인에게 열어 보이고 싶은 마음. 나의 영역을 침범받지 않으려 지우지 않는 경계-심이 함께한다. 이제 무엇을 해야 하는지. 가능성은 열려 있다. 우선은 작가가 견딜 수 있고 견디길 선택한 고독에 잠겨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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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알베르 카뮈, 「공책 제4권」, 『작가수첩 Ⅱ』 김화영(역), 책세상, 2023, pp.102-103.
2) 알베르 카뮈, 2023, p.71.
3) 울리히 하세, 윌리엄 라지, 『모리스 블랑쇼 침묵에 다가가기』, 최영석(역), 도서출판 앨피, 2008, p.101.
4) 알베르 카뮈, 2023, p.159.
5) 바실리 칸딘스키, 『예술에서의 정신적인 것에 대하여』, 권영필(역), 열화당, 2000, pp. 94-95.
; 에바 헬러, 『색의 유혹』, 이영희(역), 예담 출판사, 2003, p.181, p.221.
6) 최우영, 작가 노트, 2025.
2) 알베르 카뮈, 2023, p.71.
3) 울리히 하세, 윌리엄 라지, 『모리스 블랑쇼 침묵에 다가가기』, 최영석(역), 도서출판 앨피, 2008, p.101.
4) 알베르 카뮈, 2023, p.159.
5) 바실리 칸딘스키, 『예술에서의 정신적인 것에 대하여』, 권영필(역), 열화당, 2000, pp. 94-95.
; 에바 헬러, 『색의 유혹』, 이영희(역), 예담 출판사, 2003, p.181, p.221.
6) 최우영, 작가 노트, 20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