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



밤의 회화


북구예술창작소 소금나루2014입주작가 평론매칭 워크숍



글. 안소연(미술비평가)

    최우영의 회화는 첫인상에서 영화의 ‘스크린’ 혹은 연극의 ‘무대’를 떠올려준다. 대개 화면에 꽉찬 인물들의 몸짓에서 영화나 연극의 한 장면을 마주하는 것 같은 인상을 받는다. 게다가 인물들이 처해 있는 장소, 이를테면 비좁은 방이나 큰 탁자가 놓인 어두운 실내, 밤처럼 온통 검은 배경, 이러한 것들이 뚜렷한 서사 없이 어떤 정황을 내포한 장면처럼 펼쳐져 있다. 일종의 미장센 같은 영화적 장치나 조명 대비가 강한 연극적 연출이 강하게 느껴질 정도로, 최우영의 회화는 어떤 인상으로 먼저 다가온다. 말하자면, 화면 속 인물들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하는지, 어떤 대화가 오가는지, 그래서 어떤 사건을 함축하고 있는지, 이 모든 설명적인 것들을 등한시하고, 되레 ‘저 원탁에 둘러앉은 사람들은 누구일까?’, ‘그들이 손에 쥔 문서는 무엇일까?’,  “저 성냥불을 둘러싼 어둠 속 형상들은 무엇일까?’와 같이 눈 앞에 온전히 드러나지 않은 수수께끼 같은 정황들에 몰입하게 한다. 뿐만 아니라, 최우영은 영화적 장면을 환기시키는 ‘씬드로잉(Scene drawing)’ 연작을 통해 연속하는 이미지들에 의한 (불확실한) 서사의 가능성을 직접 드러내기도 한다.

    영화나 연극을 떠올리게 하는 최우영의 회화는 말 그대로 영화적 장면이나 연극적 순간을 회화적 재현으로 옮겨 놓은 것 같은 착시를 일으키지만, 정작 그의 시도는 서로 다른 매체를 경유하는 일련의 과정 속에서 회화적 변환의 순간에 집중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의 작가 노트를 보면 “영화와 책을 통해 떠오른 문장과 장면을 기록해왔다”는 작업의 내막을 엿볼 수 있는데, 이때 “손짓, 몸짓, 말투 등의 비언어적인 요소에 민감하게 반응”하며 “여러 장면들의 수집과 배열을 통해 말로 설명되지 않는 감정의 흐름”을 드러내려 했다는 구체적인 속내까지 알 수 있다. 최우영의 회화는 이러한 서사의 잔여물들 속에 개입한다. 최우영은 흔히들 영화 속 한 장면이라든가, 무대 위 드라마틱한 순간이라고 말하는 클리셰 같은 표현을 떠올릴 만한 이미지들을 수집한다. 때때로 책에서 몇 개의 문장들을 파편적으로 모아오기도 한다. 그는 이렇게 수집한 문장과 이미지들로 작업의 출발점을 삼곤 하는데, 거대한 서사들 속에서 분절해 온 문장과 이미지들은 그에게 불안과 고립을 직면하게 하는 ‘밤의 회화’로 이어진다. 

    밤의 회화, 최우영은 어쩌면 캄캄한 어둠과도 같은 자신의 회화에 대한 명분이 필요했을 지도 모른다. 그래서 영화, 연극, 문학 등 회화 주변에 흐릿하게 엮여 있던 매체 주변을 서성이며 그 웅장한 서사와 빛과 언어의 잔해들로부터 회화적 변환의 가능성을 길어 올리려 했던 게 아니었을까. 이를테면, 최근 작업 중 <또 다른 밤이 시작되었다>(2025)를. 보면 화면 왼쪽에 세로로 절단선이 그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유 없는 대화>(2023)에서도 화면 절단의 시도를 쉽게 알아볼 수 있다. <애도 받는 죽음>(2025)은 삼면화의 형식임을 단번에 알아차릴 수 있지만, 최우영의 회화가 보여온 흐름을 이해한다면, 화면 절단의 맥락에서 살필 수도 있을 테다. 이러한 화면 절단 외에도, <그리고 다름은 틀림이.되었다>(2025)처럼 시공간의 왜곡과 변형을 통해 시각적 불일치를 강하게 불러온다.

    최우영은 서사와 빛과 언어의 흔적을 간신히 남겨둔 채 회화적 재구성을 시도한다. 최우영의 밤의 회화는 언뜻 꽉 짜인 하나의 장면처럼 보이지만 빛 대신 어둠에 의한 시각적 불일치와 서사 대신 비언어적 움직임들이 되레 난무한다. <또 다른 밤이 시작되었다>에서, 하나인 듯 (최소한) 둘로 갈라진 화면을 알아차리는 순간 이 그림은 절단과 병합, 즉 이질성과 동일성을 동시에 지닌 수수께끼처럼 느껴진다. 다시 말해, 세로로 선명하게 드러나 있는 절단선에 의해 일정 부분 도려낸 것 같은 화면의 누락이 느껴지면서, 그것이 스스럼 없이 결합하여 다시 동일한 화면처럼 재구성되는 마법 같은 일이 벌어진다는 것이다.

    그러한 까닭에 최우영의 회화는 비가시적인 것을 동반한 밤의 회화임을 자처한다. ‘씬드로잉’ 연작의 경우, 어떤 것은 다소 줄거리가 있는 이야기의 삽화 같기도 하지만 <어쨋거나 밤은 지나갈 것이다>(2025)를 보면 화면 구성이 흥미롭다. 종이에 목탄으로 그린 화면 속 이미지는 긴 코트 자락 밑으로 한 사람의 발걸음이 향방없이 반복되어 나타난다. 아무런 서사도 흐름도 없는 이 동일하면서 분절된 이미지들의 나열은 결국 실패한 장면들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우영의 밤의 회화는 가시성의 불일치 속에서 비가시적 범주에 대한 경계면을 화면 가까이에 끌어들인다.



© 2026 Choi WooYoung. All rights reserved.